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문단 편집) ==== 언론에서 ==== 이 사건의 최초 보도는 [[중앙일보]] 1987년 1월 15일자 사회면에서 나온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제하의 2단짜리 기사였다. > 경찰에서 조사 받던 대학생 '쇼크死' > 14일 연행되어 치안본부에서 조사를 받아오던 공안사건 관련 피의자 [[박종철]] 군(21·[[서울대]] [[언어학과]] 3년)이 이날 하오[* 오후라는 뜻으로 당시에 주로 쓰던 한자어. 이 시기까지는 오전과 오후라는 말 대신 상오와 하오라는 표기가 주로 쓰였으며 현재처럼 오전과 오후로 표기가 바뀐 건 대체적으로 1993년에서 1994년의 일이다.] [[구라|경찰조사를 받던 중 숨졌다. 경찰은 박군의 사인을 쇼크사라고 검찰에 보고했다.]] [br] 그러나 검찰은 박군이 수사기관의 가혹행위로 인해 숨졌을 가능성에 대해 수사중이다. 학교 측은 박군이 3∼4일 전 학과 연구실에 잠시 들렀다가 나간 후 소식이 끊겼다고 밝혔다. [br] 한편 [[부산광역시|부산시]] 청학동 341의 31[* 현 청학119안전센터 인근.] 박군 집에는 박군의 사망 소식을 14일 부산 시경으로부터 통고받은 아버지 박정기씨(57·청학양수장고용원) 등 가족들이 모두 상경하고 비어있었다. [br] 박군의 누나 박은숙 씨(24)는 지난해 여름방학 때부터 박군이 운동권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뿐 최근 무슨 사건으로 언제 경찰에 연행됐는지는 모른다고 말했다. 박군은 부산 토성국교·[[영남중학교(부산)|영산남중]]·[[혜광고등학교|혜광고교]]를 거쳤으며 아버지의 월수입 20만원으로 가정형편이 어려운 형편이다. 이게 어떻게 알려졌는가 하면 [[신성호(기자)|신성호]] 기자가 취재거리를 찾기 위해 검사실을 돌아다니다가 어떤 검찰청 직원이 "경찰들 큰 일이야"라고 운을 뗐고 사건의 냄새를 직감한 기자가 그 사건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척 말에 맞장구를 쳐서 내용을 빼냈다고 한다. 자세한 비화는 이렇다.(출처: 박선욱 씨의 글) ||1987년 1월 15일 아침, 대검찰청 공안4과장 이홍규는 실로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공안부장 티타임에서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어제 아침 대학생이 경찰 수사를 받다가 죽었다는군.” “네? 그게 정말인가요?” “이 일은 절대 외부에 발설하면 안 돼. 다들 입 조심해!” 공안부장은 팀원들에게 단단히 함구령을 내렸다. 참석자들은 모두 가슴에 무거운 납덩어리를 매단 듯 중압감을 느끼고 있었다. 매일 회의를 겸해 차를 마시는 이 시간은, 지나간 여느 날과는 확연히 달랐다. 이날만은 자신이 알 수 없는 진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속도감과 아득함을 동시에 느꼈다. 티타임이 끝난 뒤, 10층 사무실로 돌아온 이홍규 과장은 가슴속 양심의 소리가 격렬히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것을 애써 누르고 있었다. ‘어린 학생의 죽음을 이렇게 덮어두어도 되는가? 그것은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르는 짓 아닌가?’ 그는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그동안 검찰이 권력의 눈치를 봐왔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렇게 진실을 묻어둔 채 넘어가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는 윗사람들의 결정에 그냥 따르기가 무척 괴로웠다. 오전 회의를 마친 뒤, 내내 서성이며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1분, 1초가 흐를수록 진실의 무게가 태산처럼 자신의 존재를 압도해오고 있었다. 오전 9시 50분, 중앙일보 사회부의 신성호 기자가 찾아왔다. 이 과장은 차나 한 잔 하라며 자리에 앉혔다. 법조계 출입 6년차인 신 기자는 서소문동 검찰청사를 매일같이 드나들어 이 과장과는 오랜 친분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편이었다. “경찰들 큰일났어.”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이 과장이 불쑥 내뱉었다. 뭔가 긴급한 일이 터졌다는 느낌이 꽂혔다. 자칫 서두르다가는 줄기를 놓칠 수 있었다. 그는 상황을 알고 있다는 투로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입니다. 경찰들이 요즘 너무 기세등등했거든요.” 신성호 기자는 이날 그가 딥 스로트(deep throat), 즉 내부 비리를 고발하는 익명의 고발자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과장은 어제 경찰 조사를 받던 학생이 죽었다는 충격적인 내용을 털어놓았다. “서울대생이라지, 아마? 그 대학생이?” 이어지는 그의 말이 천둥처럼 들렸다. 하지만 신 기자는 태연한 얼굴로 대화를 이어갔다. “어디서 죽었대요?” “남영동이라던가?” 말을 마치자, 이홍규 과장은 가슴속 바윗돌 하나를 덜어낸 것처럼 후련해졌다.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신 기자의 눈에 언뜻, 살아 꿈틀거리는 기사의 몸통이 보였다. 남영동은 치안본부 대공분실을 의미했다. 남영동은 이 사건의 뇌관이었다. ‘경찰 조사를 받던 서울대생이 죽었다.’는 게 이 사건의 핵심이었다. 여기에 뇌관을 집어넣으면 어마어마한 메가톤급 문장이 되었다. 그 후폭풍의 범위는 아무도 측량할 수 없었다. ‘남영동에서 조사 받던 서울대생이 죽었다’는 것은 곧 ‘고문에 의한 사망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군사독재 시절의 은유가 직유로 바뀔 절호의 타이밍이었다. 신성호 기자는 대검찰청을 나온 뒤, 데스크인 이두석 사회부장에게 곧장 전화했다. “이 부장,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이 갑자기 죽었답니다.” “뭐라고? 그거, 큰일이군. 이봐, 신 기자. 중앙수사부와 서울지검에 가서 고문 사실 여부와 사망자 인적 사항을 철저히 확인해봐.” 전화 통화를 끝낸 두 사람은 바삐 움직였다. 이 부장은 서울대 출입기자와 부산 주재기자에게 각각 학적부 조회, 가족관계 확인을 지시했다. 신 기자는 곧장 중앙수사부 1과장 이진강 부장검사에게 달려갔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대뜸 이 부장검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조사받던 대학생이 죽었다는데, 고문 아닐까요?” “가능한 일이지만 속단할 수는 없지.” “다른 데도 아니고 남영동이잖아요.” “경찰이 쇼크사로 보고했다잖소. 조사를 더 해보면 알겠지.”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이진강 부장검사의 표정에 당황한 기색이 비치며 말꼬리가 처졌다. 중앙수사부 사무실을 나온 신 기자는 서울지검으로 발길을 돌렸다. 서울지검은 공안사건 보고를 받고 처리하는 곳이었다. 그는 최명부 1차장 검사를 만나 따지듯이 물었다. “젊은 청년이 쇼크사했다는 걸 믿을 수 있어요? 노인도 아닌데요. 고문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 검찰이 직접 수사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최 차장은 난감한 얼굴이었다. 사실 확인을 해주는 대신 굳은 표정으로 한 마디 했다. “당신, 조금이라도 기사를 잘못 쓰면 곤란해. 책임을 피하기 어려울 걸.” 신 기자는 쐐기를 박는 듯한 최 차장의 말을 어깨로 받으며 사무실을 나섰다. 오전 11시 30분, 그의 다음 행선지는 서울지검 공안부 김재기 검사실이었다. 신 기자는 취재수첩을 펴들고 사망한 학생의 인적 사항 확인에 들어갔다. “검사님, 경찰 조사를 받다 사망한 서울대생 이름이 뭔가요?” 김 검사는 신 기자가 이 사건에 대해 거의 다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선선히 대답해주었다. “박종, 뭐라고 했는데…….” “학과는요?” “언어학과 3학년.” 그는 숨 가쁜 오전 취재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의 손에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진실의 조각들이 쥐어져 있었다. 서둘러 발품을 판 보람이 있었다. 데스크에도 각 주재기자와 출입기자들의 보고가 이어졌다. 학생의 이름은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인 박종철이었다. 부산 가족들과도 통화가 이루어져 가족관계 확인도 마쳤다. 가족들은 경찰의 연락을 받고 서울로 떠난 뒤라서 부재중이었다. 이제, 신성호 기자의 머릿속에는 조각조각 나뉜 진실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었다. 그는 기사를 작성한 뒤 데스크에 전화했다. “신 기자, 시간 없으니 기사 쓴 것 지금 불러줘.” 그가 기사를 불러주자 데스크가 받아 적기 시작했다. “14일 연행되어 치안본부에서 조사를 받아오던 공안사건 관련 피의자 박종철군(21.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이 이날 하오(오후) 경찰조사를 받던 중 숨졌다. 그러나 검찰은 박군이 수사기관의 가혹행위로 인해 숨졌을 가능성에 대해 수사 중이다.” 데스크에서 기사를 모두 확보한 시간은 오후 12시, 점심시간이었다. 편집국에 비상이 걸렸다. 석간 초판 인쇄는 이미 끝난 뒤였고, 이제 막 돌판(1.5판) 인쇄가 돌아가고 있었다. 인쇄소 안에는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바퀴 소리 같은 규칙적인 기계음이 가득 했다. “윤전기 세워!”[* 여담으로 자신의 [[특종]]이 돌아가던 [[윤전기]]를 정지시키는 것은 [[기자]]로서 최고의 명예로 친다.] 금창태 편집국장대리가 인쇄소에 직접 가서 지시했다. 윤전기가 일시에 멈췄다. 그는 신성호 기자가 쓴 속보성 기사를 사회면에 2단 기사로 집어넣었다. 윤전기를 돌리라는 그의 지시에 따라 윤전반의 기사들이 신속히 움직였다. 가동을 다시 시작한 윤전기에서 거친 쇳소리가 들렸다. 1987년 1월 15일 오후 3시 30분, 가판대에 쏟아져 나온 《중앙일보》가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특종이었다. 사람들은 커다란 활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 [*원문 <警察에서 조사받던 大學生 "쇼크死”>] 주먹만 한 제목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표정은 경악 그 자체였다. 이 기사는 바야흐로 온 세상을 폭풍 속으로 휘몰아갔다. 국내 신문들이 다투어 후속 보도를 내보내는 사이, 《AP》《AFP》 등 서울발 외신의 긴급 타전이 이어져 박종철 군 사망 소식은 전 세계에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신문이 가판대에 깔린 뒤, 편집국에는 전화가 빗발쳤다. “기사 당장 안 빼?” 맨 먼저 문공부 홍보조정실 담당자가 금창태 《중앙일보》 편집국장대리에게 전화해 대뜸 욕설을 퍼부으며 항의했다. 문공부는 ‘보도지침’을 충실히 이행하는 정권의 나팔수였다. 강민창 치안본부장도 뒤이어 전화를 걸어 핏대를 세웠다. “그 기사 오보야, 오보!” 하지만 진실을 언제까지나 은폐할 수는 없었다. 다급해진 경찰은 긴급 대책회의를 연 뒤, 오후 6시에 대국민 기자회견을 가졌다.|| 하지만 이후 중앙일보는 후속 보도에 소극적이었다. 1월 15일 MBC는 단신을 통해 이 사건을 내보냈는데 당시 담당앵커였던 [[신경민]]은 통상 15~20초면 읽는 단신문장을 30초 이상 길게 끌었다는 일화가 있다.[* 위의 유투브가 그 단신이다. 당시 첫 전파보도] 당시 MBC 보도국에서는 "신경민이는 끝도 없이 단신을 하냐"는 이야기가 나왔다고 한다. [[동아일보]]가 1월 16일부터 부검의 오연상과 박종철의 삼촌인 박월길 등의 증언을 상세히 보도하면서 단순 사망이 아님을 보도하기 시작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701160020921100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7-01-16&officeId=00020&pageNo=11&printNo=20089&publishType=00020|#1]]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701170020920700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7-01-17&officeId=00020&pageNo=7&printNo=20090&publishType=00020|#2]] 그리고 [[보도지침]]을 어기고 1월 19일에는 "물고문으로 질식사"를 1면 탑기사로 실어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701190020920100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7-01-19&officeId=00020&pageNo=1&printNo=20091&publishType=00020|대서특필]]하고 고문 근절 특집 기사를 사회면에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공론화되었다. [[동아일보]]의 이 보도는 [[6월 항쟁]]을 촉발한 결정적인 보도였다. [[https://www.donga.com/news/People/article/all/20180108/88062527/1|당시 상황에 대한 박종철 형의 인터뷰]] [youtube(cJNxpyuCvvo)] 2020년에는 사건이 중앙일보에 의해 최초로 보도된 직후 사건이 일어난 장소인 남영동 대공분실 앞에서 경찰들과 싸우면서 취재하는 [[KBS]] 기자의 영상이 40년만에 공개되었다. 당시에는 [[전두환|정권]]이 [[군사독재|정권]]인지라 언론들에 대한 탄압이 심했고 특히 KBS는 국가의 영향을 제일 많이 받는 방송사임에도 과감하게 취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